2025. 9. 12. 13:09ㆍ공간과 마음
과거의 삶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남아 있습니다.
중국 푸젠성 깊은 곳에 자리한 토루(土樓)는
객가인들이 생존을 위해 쌓아 올린 집입니다.
수백 년을 버텨온 두터운 벽은 외부의 위협을 막기 위한 방패였습니다.
그러나 토루는 단순한 방어의 성곽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지켜낸 공간이자,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 사이의 온기를 일깨워 주는 집입니다.

1. 좁아진 공간, 멀어진 마음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
환한 도심의 불빛,
빼곡한 빌딩숲—
너무도 익숙한 도시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만큼
우리의 마음도 밝고,
거리도 가까울까요?
경쟁이 된 일상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마음은 점점 더 고립되고 약해집니다.
혼자 살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삶은 편리해졌지만,
정작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이런 시대에 중국의 ‘토루(土樓)’는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낯선 땅에 둥근 집을 짓고,
그 안에 공동체를 설계했던 사람들—객가인(客家人).
경작지조차 넉넉하지 않은 험한 땅에서,
서로를 지키고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함께 살기 위해’가 아니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둥글게 모였습니다.

중국 푸젠성의 전통 흙 건축 **‘토루(Tulou)’**는 객가인(Hakka)의 공동체 주거문화를 잘 보여주는 원형 구조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2. 낯선 땅, 둥글게 엮은 객가인의 삶
당나라 말기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전란과 혼란 속에서 북방의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객가(客家)라 불리게 된 객가인들은 푸젠성과 광둥성 등 산간 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외지인으로서 차별과 배척, 도적의 침입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경작지조차 넉넉하지 않은 험한 땅에서, 서로를 지키고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3. 토루, 둥글게 삶을 감싸다.
푸젠성 (Fújiàn shěng :복건성)의 객가인들은 방어와 생존을 위해 원형의 집을 택했습니다.
토루의 둥근 구조는 단순한 건축 양식을 넘어, 마음을 모으고 사람을 보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두껍고 단단한 외벽. 그 안쪽에는 줄지어 연결된 가족들의 방.
중앙엔 마당이 있어 공동의 시간을 공유했습니다.
이 집은 위계로 나뉘지 않았고, 적이 들어올 수 있는 출입구도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곧 집의 구조가 되었던 셈입니다.

두꺼운 외벽은 평균 1.5m 이상, 높이는 3~5층에 달해 성벽 못지않은 방어력을 지녔습니다.
외벽은 창을 거의 두지 않아 침입을 어렵게 했고, 오직 안쪽을 향한 창만이 있어 보안과 사생활을 동시에 확보했습니다.
벽은 돌과 흙, 나무, 죽순껍질 등 지역 자재를 활용한 '흙 건축'의 정수로, 습도 조절과 단열 기능도 탁월했습니다.
◎ 공유하는 마당, 공유하는 정신

공동체를 중심에 토루의 원형 마당은 물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고 생활의 중심이자 정신적 울타리였습니다.
공동 취사와 제사, 회의, 놀이 등 일상의 대부분은 마당에서 이뤄졌고, 이를 중심으로 방들은 띠를 이루며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층에서든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당이 한눈에 들어와 둥글게 감싸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지켜내며, 내면으로는 끈끈한 유대감을 쌓아갔습니다.
토루의 이러한 구조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명확히 나뉘면서도 서로를 향한 연결감을 잃지 않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토루'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자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 삶의 질서, 층별 구성

토루는 층별로 뚜렷한 기능이 있습니다. 1층은 주방과 저장고로, 공동의 식재료를 함께 다루고 불을 피우는 공간이었습니다.
2층은 창고 혹은 부엌을 보조하는 공간, 3층과 그 이상은 가족이 머무는 거주 공간이자 휴식처였습니다. 다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하며 연대감을 키워냈습니다.
공간마다 역할이 다르되, 어느 층에서도 마당을 향한 연결은 이어졌고 둥근 하늘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 토루의 중심, 둥근 마당과 둥근 하늘

이곳은 자연과 삶이 만나는 공간이자, 고단한 하루를 위로받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소였습니다.
토루 속 마당에 서서 위를 바라보면, 둥글게 잘린 하늘이 마치 의식의 창처럼 떠 있습니다.

무겁고 단단한 흙벽에 둘러싸여 있지만, 하늘은 언제나 열려 있었던 것.
그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서로를 감싸며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였을지 모릅니다.

◎ 최적의 재료, 흙
두껍게 쌓은 흙벽은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한 자연의 단열재였으며,
지진이나 태풍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손으로 눌러 쌓아 올리는 방식은
공동체의 시간과 노동이 고스란히 스며드는 구조이기도 했습니다.
과시를 위한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안에서 서로를 지키는 데 집중한,
흙은 그런 용도에 딱 맞는 진솔하고 믿음직스러운 재료였습니다.



토루는 원형과 사각형이 함께 존재합니다. 실제로는 방형(土樓)도 적지 않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둥근 토루는 주로 중국 남부 푸젠성(복건성) 산간 지역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원형과 방형이 나란히 놓인 마을은 마치 산골짜기에 새겨진 거대한 기하학적 풍경화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독특한 건축 문화는 2008년 “푸젠 토루(Fujian Tulou)”라는 이름으로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전 세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원형 토루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상징적으로 등장합니다. 중국 애니메이션 〈대어해당(大魚海棠, Big Fish & Begonia), 한국에서는 ‘붉은 고래’로 알려진 작품 속 배경이 바로 원형 토루입니다.
작품에서 토루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세상과 단절된 채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특별한 공간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합니다.

4. 낯선 풍경이 부른 오해
둥글고 거대한 원형 지붕들이 산골에 어슴푸레 모인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군사 기지 같은 인상을 줍니다.
실제로 냉전 시절, 미국 위성사진을 본 정보 분석가들은 푸젠성의 토루들을 핵 미사일 사일로(nuclear missile silo)로 오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오해였지만, 그만큼 토루는 위압적인 크기와 독특한 형태, 방어적 구조를 가진 건축물이었고,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토루에 모이게 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5. 여전히 살아 있는 집, 토루의 새로운 얼굴

지금도 일부 토루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일부는 게스트하우스나 호텔, 혹은 작은 박물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여행자들은 둥근 복도를 따라 걸으며 서로의 일상을 마주하고, 중앙 마당의 긴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벽은 두껍지만 마음은 가까운 구조를, 단순히 ‘본다’가 아니라 하룻밤 머물며 체험하는 경험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현실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공동체의 유대감을, 이곳에서는 체험을 통해 잠시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토루는 우리가 잊고 살던 온기를 되찾게 하고, 사람이 결국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마음이 밝아지고 삶이 건강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공간입니다.

생존의 공간이었던 토루,
이제는 마음을 회복시키는 공간이 되다.
6. 마무리하며
토루는 객가인들의 생존을 위한 집이자,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설계한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 독특한 건축물만으로도 오래 기억될 가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는 서로를 지키고 이어주던 마음의 구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벽 하나 사이 이웃과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갑니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식구들이 식사한끼 함께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
토루의 삶은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을 일깨웁니다.
‘나’보다 ‘우리’를 먼저 두는 일,
소통을 이어가고 공동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삶일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토루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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